신문사소개 | 광고안내 | 기사제휴
 
 
 
  [오피니언]다섯개의 공, 그리고 다섯번째 공
 
기사입력 2017-09-23 11:13 기사수정 2017-09-23 11:13
   
 


기자 생활 10년 정도 지났을 때다. 다양한 분야 출입경력과 인적 네트워크에 자만할 시기다. 미묘한 표현 하나하나에 달라지는 반응, 사안의 민감함 때문에 취재 단계에서부터 매달리며 기사작성을 막는 대상들을 보면서 막강한 권력자가 된 것 같은 착각도 한다.
사실 그런 영향력을 등에 업고 몇 번은 ‘그들’과 거래를 하기도 했다.
정치 권력과 싸웠던 미디어 시장은 자본 권력의 지배 아래로 빠르게 빠져들었다. 정치 권력과 자본력은 교묘하게 양립하며 미디어를 흔든다. 지금은 철저하게 자본이다. 대다수 매체들은 자본 앞에 무릎 꿇고, 많은 기자들이 자본 앞에 옷을 벗는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흐르면 기자는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에 모든 영혼을 노출한다.
그즈음, 한 선배가 얘기했다. 우린 태어나면서 다섯개의 공을 갖고 세상에 나온다. 살다 보면 그 다섯개의 공을 버릴 수밖에 없는 때가 온다.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것들인데,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한다면 그 순서를 말해볼까.
첫번째는 일이다. 일은 던져도 튀어 올라 다시 손에 쥘 수 있는 고무공이다. 버려도 된다.
두번째는 친구다. 친구를 버리는 것은 슬픈 일이나,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버려도 된다. 실제 우린 많은 친구들을 잊고 산다. 친구 역시 다시 만들 수 있기에 고무공이다.
세번째는 가족이다. 가족을 버려야 한다면 버릴 수 있을까. 우리나라 1~2인 가구 비중은 지난 2015년 53.3%(1013만4000명)에서 매년 증가해 올해 55.4%(1082만3000명)까지 늘어났다. 일부러 버리지 않았을 뿐, 가족은 이미 해체단계다. 그 와중에 피를 섞지 않은 공동체 개념의 새로운 가족까지 등장하고 있으니, 결국 가족도 고무공이다.
네번째는 건강이다. 일이든 친구든 가족이든, 자신과 연결되어 있으나 결정적이지는 않다. 건강은 잃으면 내 육신이 사라지는 만큼, 버리기 힘들다. 다만, 100세 시대를 가능케 한 의학의 힘에 기댈 수 있다. 돌연사, 사고사가 아니라면 어지간한 질병은 고칠 수 있으니 건강 역시 다시 튀어 오를 고무공이다.
다섯번째 공 들추기 전에 KBS, MBC 파업 얘기 좀 하자.
그들은 지금 권력에 빼앗긴 자신들의 정체성을 되찾겠다고 몸부림친다. 일각에선 세상 바뀌었으니, 다시 좌파가 득세한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면 안 되는 일인가. 상식적, 합리적 세상이 되었으니 빼앗긴 봄을 되찾겠다는데 말이다. 들여다보면, 그들의 몸부림은 단순히 기회주의적 행태만은 아니다. 그들은 길고 험난한 길을 이미 걸어왔다.
MBC 노조는 이명박 정부에서만 두 번의 파업을 했다. 2010년 3월부터 39일, 2012년 1월부터 7월까지 170일. 두 번의 파업으로 모두 8명이 해고되고, 200명 이상이 징계를 받았다. 입바른 말 잘하던 뉴스 앵커들과 기자들은 TV에서 사라졌다.
그 선배가 말한 다섯번째 공은 ‘영혼’이다. 영혼은 던지면 깨져 조각조각 가루 돼 먼지처럼 흩어진다. 버리는 순간 그대로 증발하는 원소주기율표 최상단 수소(H)처럼. 다섯번째 공은 그래서 유리공이다. 깨지지 않으려거든, 단단해져라.
우린 가장 버리지 말아야 할 다섯번째 유리공을 쉽게, 어쩌면 가장 먼저 버린다. 자신만 침묵하고 눈감으면 크게 표시 나지 않기에. 깨진 영혼의 빈 공간을 타협과 거래로 채운다. 괜찮다. 괜찮다.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는가. 자위하면서.
다큐멘터리 영화 「공범자들」에 등장하는 MBC의 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싸움의 의미요? 저는 그래도 기록만이라도 의미가 있다고 봐요. 적어도 우리가 그 암흑의 기간에 침묵하지 않았다는……”
버리지 않는다고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버리지 않아야 지킬 수 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은 다섯번째 유리공, 영혼은 다시 빛날 수 있을까.
 
   
   
신문사소개 광고안내 기사제휴 개인정보처리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