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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고]합의를 문서화하는 경우의 딜레마
 
기사입력 2018-01-02 10:59 기사수정 2018-01-02 10:59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갚지 않아 고민에 빠진 사람이 이웃에게 조언을 구했다. 물론 차용증도 없었으니 빌린 자는 갚지 않으려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그 이웃은 빌린 돈의 3배를 달라는 편지를 쓰라고 했다. 그랬더니 빌린 자는 화를 내면서 나는 3분의 1만 빌렸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빌린 돈을 갚았다는 얘기가 있다. 처음에 쓰지 않은 차용증을 나중에 받아 결국 변제까지 성공한 경우다. 빌려주고 빌렸다는 합의가 문서화되자 빌린 자는 결국은 갚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수백억 원 하는 부동산거래에 있어서도 거래조건은 구두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중개사를 사이에 두고 지리한 협상을 거쳐 매매가가 정해지면 일사천리로 미리 인쇄된 간단한 계약서에 빈칸을 채우고 도장을 찍으면 매매계약이 성립돼 버리고 만다. 고작해야 보증금을 인수한다는 조건 혹은 한 두 개의 특약을 적어 넣은 후 큰 거래가 종료되어 버린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문서작성은 거추장스러운 의식이 된 지 오래되었다.
그렇지만 어렵게나마 작성해 놓은 문서가 나중에 소중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기억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시간이 흐르면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다르게 기억할 수 있다. 이때 당사자 간 합의사항을 적어 놓은 문서가 이런 이견의 상황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중립적인 제3자가 계약서만 보고서도 양 당사자의 다툼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법률가만큼 계약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다소 불편하고 번잡스럽더라도 중요한 합의의 경우에는 문서 나아가 공증까지 해 놓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현명하다. 일정한 비용이 들고 시간이 걸리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계약서 작성까지도 법률가에게 맡기거나 적어도 자문을 받아 진행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시간과 비용이라는 부담은 사실은 나중의 큰 곤란을 생각하면 딜레마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렇지 않고 대충 문서를 작성하는 분이 나중에 분쟁에 휘말렸을 때 바로 법적조치를 바라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 분들은 민사소송으로 가도 될 텐데 강력한 형사고소를 통해 상대를 형사 처벌하기를 원하기도 한다. 문제는 강력한 조치를 위해서는 증거도 합리적 의심을 물리칠 정도로 강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충 작성한 계약서로는 형사고소는커녕 민사소송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사전준비의 노력과 대응수단의 만족도는 비례하기 마련이다. 문서작성의 시간과 노력을 극복하기 어려운 딜레마로 여긴 사람이 대책 없이 상대에 대한 처벌의 수준을 감정적으로 높이게 되면 진짜 빠져나오기 힘든 딜레마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일정한 합의를 문서화하는 일은 헌법을 처음으로 문서화하던 근대 입헌주의 시기에도 비슷한 딜레마를 일으켰다.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각국은 근대 입헌주의 헌법전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여기서도 헌법을 적는 것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특히 인권목록을 헌법전에 적을 것인지는 여간 고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헌법전에 이를 적으면 나중에 이를 부인하더라도 문서라는 증거가 있으니 안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헌법에 이를 다 적을 수 없어 적지 못한 권리를 누군가가 나중에 부인할 가능성이 있어 함부로 적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합중국 헌법 역시 처음에는 인권목록이 아예 없었다. 당시 영국령 13개주 출신 건국자들이 천부인권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이를 헌법에 적을 때의 딜레마를 인식해 아예 적지 않는 방식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는 결국 적는 방식이 우월하다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인권목록을 헌법에 적으면서 다 적지 못하는 권리들이 부인당할 가능성에 대처하는 방식을 고민하게 되어 다음과 같은 글귀를 끝부분에 달았다. 즉 “여기에 열거하지 않는 인권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첨가하는 방식을 생각해 낸 것이다. 이래서 우리 헌법에서도 열거되지 않은 기본적 인권이라는 말이 나타났고 이런 방식은 아주 현명한 문서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결국 뭔가 합의된 것을 문서화하는 것은 신중함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그 전제가 당사자가 어떤 문제에 대해 합의하는 것인데 이 과정 자체가 철저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다음 단계로 합의사항을 잘 적을 수 있다. 물론 이 단계도 표현되는 것의 한계가 있고 어떻게 적어야 잘 적는 것인지의 문제는 계속 될 수밖에 없다. 우리학교 인권센터의 인권장전 역시 마찬가지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무엇에 대해 정확하게 합의하고 어떻게 이를 적어야 하는지에 대한 학내 구성원들의 고민이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정철(공법)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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