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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못된 아버지
 
기사입력 2018-03-02 11:33 기사수정 2018-03-02 11:33
   
 

고등학교 시절, 나는 커서 100억 부자가 되고 싶었다. 가난했기 때문이다. 1988년 2월, 첫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첫아이를 가졌을 때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돈으로 치면 100억 정도를 번 부자가 되었다. 이듬해 12월에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또 100억을 벌었다. 두 아이로 인해 나는 200억 자산가가 되었다. 200억 부자가 되었으니 어릴 적 내 꿈은 30대 초반에 이미 2배나 초과달성했다. 으쓱했다.
나는 이렇게 귀한 내 자식들이 반듯하게 자라기를 원했다. 나는 그들에게 평생 몸에 지니고 살아갈 삶의 기준을 주고자 했다. 그 기준은 자식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나의 무모한 욕심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못된 아버지다.
그 기준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효도하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겁하게 살지 마라’는 것이었다. 나는 틈만 나면 이 두 가지를 자식들의 젖먹이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이야기해 오고 있다. 거의 세뇌 수준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의 당부는 두 아이의 머릿속에 상처로 남아 있을지 모른다. 아니 상처가 되기를 원했다. 어떤 사람은 나의 두 가지 당부를 세상 물정 모르는 폭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과한 욕심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변명을 듣고 나면 나의 바람이 꽤 소박하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효도하라’는 말은 다음의 이유에서다.
아마도 내 아이들이 성장하면 자식들이 부모를 모시고 싶어도 모시지 못하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글로벌 시대가 일상화될 것이고 삶의 가치도 달라진 시대가 될 것이다. 자식의 직장이 미국이 될 수도 있고, 영국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 싶어도 모시지 못하는 형편이 될지도 모른다. ‘효도하라’는 말을 듣고 자란 자식은 괴로울 것이다. 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미안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미안한 마음을 갖고 불편하게 살라는 것이다. 아마도 미안한 마음을 가진 자식은 보통사람들이 부모에게 일 년에 한 번 찾아올 때 두 번 찾아오게 될 것이고, 한 달에 한 번 전화할 때 두 번 전화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항상 마음에 부모를 담고 살아가달라는 것이다.
‘비겁하게 살지 마라’는 말은 정의롭게 살라는 뜻이 아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성정은 태어날 때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믿고 있다. 어차피 비겁하게 태어난 사람은 비겁하게 살게 될 것이고, 비겁하지 않게 태어난 사람은 반듯하게 살 것이다. 내가 비겁하게 살지 마라는 것은 자신이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난 만큼만 비겁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비겁함도 마찬가지다. 비겁함은 순식간에 커진다. 나는 내 자식이 갖고 태어난 비겁함이 ‘소주잔’ 크기라면 그만큼만 비겁하게 살고, ‘대접’ 크기라면 그만큼만 비겁하게 살기를 원한다. 자신이 갖고 태어난 비겁함을 더 키우지 않고 반듯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친구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고루한 소리 하지 말라고 핀잔한다. 고루한 것과 반듯한 것은 다르다. 고루한 것은 썩지만 반듯한 것은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나는 믿는다. 효도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딜 가나 환영받을 것이고, 반듯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어딜 가나 인정받게 되어 있다. 나는 내 자식이 어딜 가나 환영받고 인정받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란다. 아버지의 이기적인 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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