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소개 | 광고안내 | 기사제휴
 
 
 
  [교수시평]명원민속관에서 톨레랑스를 생각한다
 
기사입력 2018-05-28 10:55 기사수정 2018-05-28 10:58
   
 


날도 화창하고 마음도 화창하다. 여름 장마 못지 않은 비가 있었고, 청명한 하늘이 간절히 그리워질 만큼 미세먼지와 황사도 극성이었지만, 봄은 봄이다. 그리고 어느새 이제는 초여름으로 넘어가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 정치적 기상도 사뭇 화창한 날을 기대해 봄직하게 전개되는 양상이다.
첫술에 배부를 리 없고 실망도 있겠지만, 어느 때보다 더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향한 행보에 커다란 희망과 기대를 가져 본다. 그러나 한편으론 우리 사회가 사상과 이념, 정치체제가 완전히 다른 이질적 집단을 포용하고 통합해 나갈 역량을 갖추었는가에 생각이 미치게 되면 마음 한구석이 절로 무거워진다. 우리 사회의 내부가 이리저리 갈라지고, 날 선 목소리로 서로를 적대시하며 상대방을 배타적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 채 세대 간에 갈등하고, 계층 간에 반목하며, 지역에 따라 뭉치고, 학연에 따라 쏠리며, 정치 담론은 어느새 같은 진영에 속한다고 느끼지 않으면 금기시되는 듯한 현실에서 남북 간의 화해와 교류, 나아가 통합과 통일을 바랄 수 있을까.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해질 것이오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은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2018년의 봄이 가져온 희망이 현실로 구현되기 위해서 우선 필요한 것은 우리 내부 구성원들 사이의 포용이고, 통합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학교에 깃들어 있는 관용의 정신을 되짚어 보는 것은 비단 우리 대학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이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약 122년 전 지금은 명원민속관으로 불리는 우(右)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에서 조선 시대와 한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그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톨레랑스(tolerance)의 꽃이 활짝 핀 적이 있었다. 갑신정변으로 세 살 위의 형인 한규직을 잃은 한규설이 개화파의 주요 인사로 알려진 유길준을 감싸고 되레 보호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유길준은 김옥균, 박영효와 같은 개화파의 주요 인물로 알려져 있던 인물로서 김옥균 등이 거사를 일으킬 즈음에는 미국에서 유학 중이라 직접 정변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만일 조선에 있었더라면 정변의 일익을 담당하였을 것임에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유길준은 제물포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었고, 조정에는 그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상소가 잇달았다.
하지만 사대당의 인사로 제거 대상 1순위였고, 실제로 바로 개화파에 의해 살해당한 한규직의 동생이 나서서 유길준의 구명운동을 벌이는 의외의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그리고 한규설은 극형을 면한 유길준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갑신정변 때 피해를 입은 다른 사대당 쪽 사람들이 보복하지 못하도록 연금 형식으로 안전하게 보호하였다. 당대의 대표적인 무신인 한규설의 집안에 도피해 있는 사람을 감히 해치지는 못할 것이었다.
정치색이 다른 문벌끼리는 혼인도 하지 않고, 한번 옥사(獄事)를 일으키면 삼대까지 멸해야 직성이 풀리는 풍토에서 형을 죽인 원수와 진배없는 인물을 이렇게 보호한다는 것은 지금도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길준은 그곳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준비했던 자료와 기억을 바탕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에서 경험하고 느낀 선진 문물과 제도를 책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적과의 동침(?)은 1892년까지 6년 가량 계속되었고, 그 사이 1889년에 유길준의 역작인 서유견문(西遊見聞)이 나왔다. 조선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던 한 청년의 눈에 비친 서구 세계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그 내용의 깊이와 참신함으로 인해 갑오개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최초로 국한문 혼용체를 시도함으로써 그 이후에 나오는 출간물들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고, 이로 인해 지식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바탕엔 한규설의 고결한 톨레랑스가 있었다.
그의 행위는 정작 본인은 구(舊)교도이면서 신성로마제국에서 추방된 마르틴 루터를 자기의 바르트부르크 성에 9개월여 연금 형태로 보호하면서 루터가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작센의 선제후(選帝侯) 프레데릭 3세가 보여 주었던 톨레랑스와 견줘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톨레랑스는 무관심으로 인한 냉담, 비겁함으로 인한 움추림, 내 것을 쉽게 내주는 포기와는 다르다. 개인적 자율, 권리, 존중의 요소를 고루 갖춘 ‘원칙 있는 이성(principled reason)’에서 나올 때에야만 비로소 관용은 빛을 발하는 법이다.
갑오개혁 이후 두 번의 법부대신을 역임하고, 고등재판소 소장을 역임한 한규설은 을사늑약에 끝까지 반대하고, 일제가 준 작위를 거부함으로써 톨레랑스의 참된 정신을 보여 주었다.
한편 유길준 역시 1908년 김윤식 등과 함께 강구회(講舊會)를 만들어 백성을 계몽하고, 갑신정변에서 죽인 자와 죽은 자를 묻지 않고 김옥균, 민태호, 조영하를 함께 제사하고, 여기에 동학의 전봉준의 신위까지 모시고 추념하였다. 서 있던 곳은 달랐지만 그들의 살아 생전 애국하는 마음만은 같다고 본 것이다.
한규설과 유길준이 보여준 높은 뜻과 넓은 도량은 마음은 닫고 목청만 돋워 선동과 구호를 일삼는 후손들을 부끄럽게 한다. 120년 전 명원 민속관 한규설 대감 가(家)의 어느 사랑방에서, 취운정이라 불리웠던 정자에서 당대의 거인들이 보여 주었던 화합과 상호 존중, 승인의 정신을 배워야 할 때다.
 
   
   
신문사소개 광고안내 기사제휴 개인정보처리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