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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5-28 10:56 기사수정 2018-05-28 10:58
   
 


1968년에 나는 태어났는데, 주민등록상 생년은 1969년이다. 부모 세대에선 2~3년도 늦었다는데, 그나마 다행이랄까? 국가공인기록부에 기재가 늦었으니, 그 후 인생이 줄줄이 늦을 수밖에.
1978년, 가난한 맞벌이 부부였던 부모는 우리 형제를 (방학마다) 시골 큰집, 외갓집에 맡겼다.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충주로 간 뒤, 노은면 가신리로 가라는 쪽지를 쥐여 준 것 같다. 소 돼지 닭 토끼 염소의 밥 당번은 대개 아이들이었다. 끈적이는 담배밭 고랑으로, 재 넘어 고추밭으로, 피 뽑고 소독하는 논으로도 끌려 다녔다. 서리하러 참외밭, 멱감으러 개울로도 갔지만….
1988년에 재수 아닌 재수를 했다. 명문대의 말석에라도 앉으려다(당시에 국어교육과 커트라인이 낮았다) 떨어져, 후기에 다시 시험 봐 붙었다. 원하던 학과였으나, 이를 어쩌랴? 학보사를 만났으니…. 입사해 보니(경쟁률은 7대 1인가 했다) 여기가 신문사인가, 조폭인가 했다. 규율로 조지면서, 매주 기계처럼 신문을 발행했다. 야근에 밤샘이 일상이었다.(노동해방을 하자면서?)
1998년에 나는 석사과정을 마쳐야 옳았다. 그런데 대학원학생회장으로서 펴낸 국민대학원보 학내성폭력 기사 및 국민대 제 단체 민주협의회 결성 주장 등의 사유로 징계를 당했다. 해고된 조춘화 당시 국민대노조위원장 천막에 합류해 민주광장 농성을 138일간 진행했다. 외환위기로 온통 먹구름 덮히고 폭풍이 치던 때였다.
2008년, 결혼도 이미 했고, 아이들도 둘 태어났는데, 직장에서 물러(밀려)났다. 시댁이든 처가든 부모 손을 빌리지 말자고, 우리 부부는 협의했었다. 필요와 적성과 기호에 따른 자유 선택으로 내가 전업주부가 됐다. ‘온전하게 글 쓰고 책도 내 보자’는 속셈이었지만, 식모에 유모에 요리사에 집사까지, 역할이 쉽지 않았다. (역시 세상은 뜻대로 되는 게 아니야!)
2018년에 뒤돌아보니, 반백 년 짧은(짧다고 말하면 안 되갔구나!) 삶에도 굴곡이 꽤 있다. 어릴 적엔 방치돼 ‘아동노동’을 했고, 대학엔 낙방했으며, 무기정학에 이은 퇴학을 당하고, 야근에 밤샘에, 지금은 조기은퇴해 부평초가 된 삶 아닌가. 그런데 인생이란 참 묘하다. 열 살 소년이 본 그 시골 밤하늘은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대학에선 기자로 종횡무진 세상과 사람 사이를 누볐다. 천막에서 만난 학우들과 노동자들의 기억은 지금도 내 가슴을 데우고 밝히는 햇불로 남아 있다. 세상의 일과 질서에서 벗어나니 마을과 자연과 책과 아이들과 삶이 내 안에 들어왔다.
2018년에 나는 토종벼 논에 심고, 책 모임 하고, 서울숲 정원 가꾸고, 아이들과 매주 놀고 자원봉사하고, 예술가들을 만나 일하고, 동네서 잡지를 만들고, 지금 이 글을 쓴다. 나쁜 일은 꼭 나쁜 일이 아니다. 삶에서의 일이란 결국 쓸모없는 시간도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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