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소개 | 광고안내 | 기사제휴
 
 
 
  [특집]3.1운동 100주년, 다른 나라의 독립운동은?
 
기사입력 2019-02-28 12:45 기사수정 2019-02-28 12:48
   
 
2019년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해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 사상이 바탕이 되었다. 한 민족이 그들 국가의 정치적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뜻인
‘민족자결주의’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독립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독립운동은 어땠을까?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우리 손으로 미국
미국의 독립운동은 영국의 가혹한 정치와 과중한 중상주의적 과세에 저항해 식민지였던 미국의 13개 주가 연합하여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동시에 내부의 정치·사회적 개혁을 달성한 혁명이다.
당시 영국 정부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인쇄물, 차, 커피 그리고 주식인 밀과 생활 필수품에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수출·수입하는 모든 물품을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동인도 회사가 독점하는 등 미국의 상인들과 회사가 아예 무역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새로운 법은 많은 미국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참지 못한 보스턴 시민들은 1773년 보스턴 항구에 정박해 있는 동인도 회사의 무역선을 습격해 차가 담긴 342개의 상자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이것이 바로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인 ‘보스턴 차 사건’이었다. 그 뒤, 식민지 13개 주의 대표가 영국의 불합리한 법에 대항하기 위해 제1차 대륙 회의를 열어 영국의 압제로부터 식민지의 권리와 자유를 수호할 것과 통상 단절을 결의했다.
제1차 대륙 회의 이후, 미국은 전쟁을 준비했다. 1775년 제2차 대륙 회의에 참가한 벤저민 프랭클린과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다섯 지도자는 독립을 위한 기초 작업에 들어갔고 마침내 1776년 7월 4일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미국 독립 선언’을 필라델피아에서 발표했다.
이후 미국은 영국과 적대관계에 있던 여러 나라의 도움을 받아 요크타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결국 1783년 영국은 파리에서 체결된 조약에서 13개 식민지의 독립을 승인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인도
영국은 18세기 중엽부터 불거진 프랑스와의 식민지 전쟁에서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힘썼다. 영국의 식민 지배는 인도의 통치제도는 물론 경제생활과 사회 질서를 큰 혼란에 빠뜨렸다. 그로 인해 영국의 인종 차별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도인들의 반영 감정이 폭발했고 1857년 세포이 항쟁이 일어난다. 세포이 항쟁은 많은 인도인의 호응을 얻어 반영 민족 운동으로 발전했지만 실패로 끝나게 된다.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인도는 반영 독립운동을 하며 근대화를 위한 자체의 개혁에 힘썼다. 인도인들은 인도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영국의 식민 정책에 대항했다, 인도 국민회의는 영국 상품 배척, 국산품 애용(스와데시), 자치 획득(스와라지), 민족 교육이라는 네 가지 목표를 결의하는 등 반영 운동을 주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인도의 독립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오히려 민족 운동을 한 사람을 마음대로 잡아갈 수 있는 ‘롤라트 법’(1919년 3월) 등을 제정했다. 또한 영국은 인도의 독립을 보장해 주겠다던 약속을 백지화했고 도리어 인도의 민족 운동을 탄압했다. 당시 인도 국민 회의파의 의장이었던 마하트마 간디는 ‘롤라트 법’의 철회와 인도의 자치권을 요구하며 비폭력·불복종 저항 운동을 벌였다.
1930년 제2차 불복종·비협력 운동과 1942년 제3차 영국 세력 철퇴 운동 등 인도 국민들은 끝까지 반영 독립 투쟁을 벌였다. 인도의 독립운동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계속되었고 1947년, 마침내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지금도 독립을 소망하고 있는 국가 티베트
티베트는 현재 중국의 자치구이다. 1950년 중국은 티베트의 국민당 정부를 몰아내고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중국은 1951년에 티베트를 무력 점령하고 ‘평화해방에 관한 협정’을 강제 체결했다. 티베트 대표단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이에 반발한 티베트인들은 크고 작은 시위들을 계속했다. 1959년 3월 중국 정부에 의한 강제 개혁과 한족 대량 이주에 분노한 티베트인들은 수도 라싸를 중심으로 대규모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독립운동은 중국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고 약 86,000명(티베트 망명 정부의 추정치)의 티베트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티베트 불교의 최고 지도자이자 정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14세(이하 달라이 라마)는 추종자 약 1,000명과 함께 인도로 망명해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현재 달라이 라마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티베트의 독립을 호소하고 있다. 2008년 3월 10일에도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티베트 반정부 시위대가 중국 공안과 충돌하면서 80여명(티베트 망명 정부의 추정치)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지금도 달라이 라마의 귀국, 티베트의 독립과 자유를 소망하고 있는 티베트인들은 분신을 통해서 중국의 티베트 탄압 정책에 대항하고 있다. 2009년 2월 27일 티베트 끼르티 사원의 따뻬 스님이 중국의 탄압에 항의하며 거리에서 첫 분신을 단행한 이후 2009년부터 2017년까지 무려 151명이 분신했으며 지금까지도 분신을 통한 항거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다시 찾자, 나의 조국, 카탈루냐 독립운동
카탈루냐는 스페인 동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 바르셀로나를 비롯해 지로나, 타라고나 등 4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카탈루냐는 독립 국가였지만 1714년 스페인에 강제 병합됐다. 카탈루냐 인들은 이때부터 스페인 인구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카스티야인들과 경제적·사회적 갈등을 빚으며 계속해서 분리·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게다가 카탈루냐인들이 스페인 GDP에서 약 20%를 책임지는 만큼 스페인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이로 인해 연간 카탈루냐 지역내총생산(GRDP)의 9%(약 170억 유로)가 스페인 중앙정부를 통해 다른 지방정부를 돕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카탈루냐 인들의 불만이 고조됐고 2014년 진행된 분리·독립 비공식 주민 투표에서 약 81% 주민들이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다.
또한 2017년 10월 1일, 카탈루냐는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주민 투표를 실시해 주민의 90% 이상이 찬성했다. 이에 스페인 중앙정부는 ‘독립은 절대 불가능!’이라며 강경하게 맞섰다. 또한 스페인 총리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몰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뿐만 아니라 경찰은 분리·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등 강하게 대처해 현장에 있던 많은 시민이 부상을 입었다. EU(유럽연합)측은 카탈루냐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스페인 정부의 무력 진압은 반대하나 카탈루냐의 분리·독립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현재도 스페인 중앙정부와 카탈루냐 자치정부의 갈등은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다르다. 홍콩 독립운동
홍콩은 원래 청나라의 영토였으나 1841년 제1차 아편전쟁 때 영국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다음해 난징 조약으로 인해 영국에 정식으로 양도되었다. 태평양 전쟁 때는 잠깐 일본의 점령 하에 있다가 일본의 패전 이후 다시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대만과 중국은 영국의 홍콩 점령을 불평등조약의 결과로 간주하여 인정하지 않고 행정권만 인정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100년 가까이 홍콩을 식민지로 두었으나 90년대에 중국과의 홍콩 반환 협상을 통해 홍콩은 1997년에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중국은 홍콩을 특별행정구역으로 지정해 일국양제, 즉 한 나라 안에 두 가지 정치체제를 인정하여, 식민지 시절 홍콩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유지해나가고 있다.
그러나 반환 이후, 중국 본토인들이 다수 홍콩으로 이주하여 기존 홍콩 사람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100년 가까이 본토와 홍콩은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회·문화 전반에서 차이가 생겼고 그로 인한 갈등이 심해지고 있다.
현재 중국 중앙정부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중국 내에 합법적인 정부는 오로지 하나라는 뜻이다. 따라서 중국 중앙정부는 홍콩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중국 중앙정부에 대한 반발로 홍콩 내 민주화를 요구하는 우산 혁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우산 혁명의 연장선으로 기존 홍콩 사람들의 독립 요구 시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김진실 기자 이호연 기자
 
   
   
신문사소개 광고안내 기사제휴 개인정보처리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