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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의 눈]좀 예민해도 괜찮아
 
기사입력 2019-05-26 16:01 기사수정 2019-05-26 16:01
   
 


고등학교 때 국어 수업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왜 긴 생머리를 하고 있냐.”라는 선생님의 물음에 친구는 “긴 머리가 편하고, 단발이 안 어울린다.”라고 대답했다. 이어지는 “정말 긴 머리가 편해?”라는 선생님의 물음에 친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말 긴 머리가 편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대답이지만, 그때는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지금 저 대답을 했던 친구는 단발로 머리를 짧게 잘랐다.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우선 나부터가 변했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국어 선생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긴 생머리’처럼 오랫동안 여성들에게 강요되어 와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로부터 탈피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아……. 좀 과격하시네요.” 대학교에 와서 이 말을 자주 들었던 것 같다. “총여학생회 폐지는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을 때도, “산하기관으로 존재하는 것 말고, 총여학생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내 생각을 말할수록 ‘내가 정말 예민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할까 싶다가도 참고 넘어가게 됐다. 하지만 과연 여성과 남성이 학교 내에서만큼은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에 발생한 서울교대 성희롱 사건으로 징계를 받은 남학생들의 수는 무려 11명이었다. 이들은 여학생들의 외모를 품평했고, 아무 죄책감 없이 성희롱을 일삼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내가 너무 예민한 건지 생각해야 했다.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표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올해 방영했던 웹드라마 <좀 예민해도 괜찮아 2>를 보게 됐다. “자꾸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걸 이상하다고 말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아요.”라는 대사를 듣는데 낯설지가 않았다.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떠오르면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다.
작년에 나는 거리로 나가 ‘불법촬영 중단’과 ‘편파판결 규탄’을 외쳤고, 올해는 자원봉사자로서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35회 한국여성대회’에 참여했다. 내가 현장에서 많은 사람과 얘기를 나누며 느낀 것은 여성 혐오는 여전하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이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뒤에 꼭 따라오는 말이 있다. 일부 ‘과격’한 페미니스트들은 싫다는 것.
그들이 말하는 ‘과격’한 행동이 뭘까. 어쩌면 ‘과격’이란 말로 여성들을 또다시 억압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버닝썬 사건과 남자 연예인 단톡방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허무함이었다. 작년에 혜화역 일대와 광화문에서 열린 시위들이 떠오르며 ‘저 사람들은 우리가 우스웠겠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 혐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성을 향한 사회적 잣대는 남성보다 더 엄격하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더 이상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 처음에 나는 뭐가 두려워서 스스로를 검열하려고 한 걸까. 당연히 예민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들이었다. “왜 이렇게 예민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무감한 게 아닐까? 우리는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좀 예민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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