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라토리엄(moratorium)’이라는 용어는 이미 신문이나 뉴스 등에서도 자주 언급된 바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98년에 있었던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이 있다. 여기서 모라토리엄은 경제학 용어로 ‘국가의 대외채무지불을 일시적으로 유예하는 것’을 뜻한다. 지금은 고유가 등의 호재로 인해 러시아 경기가 성공적으로 회복됐지만, 당시 러시아는 이 선언으로 인해 국가 신용도가 바닥으로 떨어져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금을 빌리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이 ‘모라토리엄’이라는 개념이 본래 지니고 있던 의미를 넘어 사회과학적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미국의 정신 병리학자 E.H.에릭슨은 인간의 발달단계를 8단계로 구분하고, 각각의 발달단계의 과업에 존재하는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인간이 발달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청소년기의 발달과업은 자아정체성의 획득이다. 이 시기는 신체적인 면에서는 성인과 큰 차이가 없으나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 확립을 미루고 있는 상태라는 점에서 정체성 유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에릭슨의 연구와 비슷하게 ‘모라토리엄 인간’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모라토리엄 인간’이란 ‘성인이 되었음에도 성인으로서 요구되는 사회적인 책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라토리엄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쉽게 일자리를 떠나는 집단을 말하는 ‘프리터(free arbiter의 줄임말)족’과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서 일도 하지 않는 집단을 말하는 ‘니트족(NEET: Not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도 모라토리엄 인간의 사례로 볼 수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모라토리엄 인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에 모라토리엄 인간이 나타나는 이유 중 하나로 장기적인 경제 침체를 꼽는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사회적 고용이 줄어들어 젊은 세대들이 반강제적으로 모라토리엄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고용이 불안정해지면서 정규직에 있는 사람 역시 직업에 대한 귀속의식이 희박해지고 방관자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분석한다. 이렇듯 이 용어가 이슈화된 원인은 모라토리엄 인간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적 시스템이 모라토리엄 인간을 양산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으로 부터 비롯된다.

일본에서 나타난 사회문화적 현상을 이제는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게 됐다. 얼마 전 크게 이슈가 됐던 ‘88만 원 세대’라는 책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모라토리엄 인간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사회적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에 대한 대비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두가 공통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해결방안의 마련에 노력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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